함께 가는 길
만산홍엽의 계곡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산골이다.
한 쌍의 비둘기인양 진달래 빛 고운 커플 한복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가 있다.
진분홍 치마를 새색시처럼 여민 소녀 같은 할머니와, 할머니와 꼭 같은 색의 조끼를 받쳐 입은 할아버지가 신선처럼 노니는 모습은 천상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 부부는 비록 비둘기 둥지 같은 소박한 집에서 소찬으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자연을 품에 안고 부자로 살고 있다.
개구쟁이 소년과 단발머리 나풀대는 어린 소녀가 되어, 계곡을 무대삼아 정답게 살아가는 한 쌍의 부부와 잠시나마 동행하게 됐다.
어린 소년 소녀가 두 손 맞잡고 함께한 지가 70년을 훌쩍 넘기고 보니 이젠 백발의 노부부로 변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엔 사랑이 샘물 되어 솟아나고 있으니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낙엽을 쓸고 있는 흰머리 소녀에게 백발의 개구쟁이 청년이 수작을 건다. 낙엽을 소녀의 머리에 퍼붓고는 깔깔대는 모습이 철없는 어린아이 같다. 맞받아치는 소녀도 만만찮다. 까르르 웃음으로 받는 소녀의 얼굴이 단풍처럼 붉다.
빨래터에서도 소년은 물장구를 시작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빨래하는 소녀 앞을 겨냥해서 물수제비를 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물벼락을 맞은 소녀가 팔딱 일어나 뒤쫓으면 소년은 낄낄대며 달아난다. 뒤쫓는 소녀의 모습이 비 맞은 생쥐 같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모처럼 딸과 함께 요즈음 한창 뜨고 있는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를 감상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장면들이 순수한 사랑이 메말라 가는 이 시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큐영화가 극영화보다 더 신선하고 감동적이라는 것을 예전엔 미처 생각지 못했다.
90을 넘긴 노부부가 십대의 푸른 소년이 되어 비둘기처럼 원앙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그림 같이 아름답다. 이들의 삶은 오염된 이 땅에서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욕심을 버렸고 나이를 버렸다. 오직 사랑의 눈빛으로 상대만 바라봤다. 굽이치는 물결도 모진 비바람도 두 손 맞잡고 함께 가니 두려움이 없었다.
강원도 산골의 매서운 추위에 꽁꽁 언 손을 맞잡고 불을 쬐는 모습은 사랑의 극치다. 사랑이 언 손을 녹여주니, 가슴엔 어느새 훈훈한 봄바람이 분다. 이들 부부는 단연 사랑의 승리자요, 이 시대 부부들의 롤 모델이다.
자신의 아집과 욕심을 앞세워 상대의 아픔은 보지 못하고 상대의 눈에든 티만 보려 하는 현실에서 이들의 순애보는 이세상 모든 부부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소박한 가옥이지만 그들이 살면 대궐이 됐고, 나물 반찬도 그들 부부가 함께 먹으면 진수성찬이 됐다. 이들 부부는 사랑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으니 세월도 비켜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90이 넘어도 청춘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적멸로 가는 장거리 열차에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떠나는 단풍처럼 우리 인생도 적당한 역에서 하차해야 순리인 것 아닌가.
잉꼬부부라고 피할 수는 없다. 하나 둘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이제 마지막 남은 분신을 떠나보낼 때가 왔다. 만남도 떠남도 자연의 순리인 것을….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분신인 남편을 보내고 그의 묘소 앞에 앉았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3개월만 더 살았으면 나와 함께 손잡고 그 길을 갔을 텐데, 그 곳에 가거든 곧장 날 데리러 오세요. 손잡고 같이 가게."라며 울먹일 때는 나도 주책같이 눈물을 찍어 내렸다. 할머니는 평소 입던 옷을 태우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할머니의 마음을 싣고 할아버지 곁으로 가리라. 할머니도 이제 다음 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인가!
아직도 이 땅에 이런 순애보가 있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요즈음은 흔히들 환갑을 넘기면 부부가 각방을 쓰며 삼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남편 밥상 차리기를 귀찮아하는 추세다. 심지어 남편이 하루속히 가 버렸으면 하는 할머니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이렇게 오염에 가속도가 붙는 현실에서 이들 부부의 이야기가 정지 페달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들 부부에게는 무엇이 남 달라 이렇게 승화된 부부애를 키워왔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아마 이들의 가슴엔 양보와 베품의 철학이 배어있지 않았을까.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나의 생활을 노부부의 생활과 비교해 보면 간단하다. 늘 상대가 베풀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함에 불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상대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이렇게 사랑도 미움도 삼투작용을 한다고 생각된다.
내가 진하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양보한다면 농도가 옅은 상대방이 흡수되고 동화되는 것이 바로 삼투작용이라는 것이다.
간단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60평생을 살아왔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또 강하게 베풀면 상대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을….
마침 같이 간 딸아이에게 "너도 저런 노후를 맞고 싶지 않니?" 라고 물었더니 "저 분들은 서로가 같은 철학을 가졌기 때문일 거예요, 서로가 모두 잘 하잖아요. 아마 저런 경우는 흔치 않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사랑의 삼투작용에 대해 말하려다 다음으로 미뤘다. 꼭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이 느껴 질 수도 있을 테니까.
말로만 훈계하면 설득력이 없지 않나 싶어, 우리 부부가 먼저 딸아이에게 본을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정이고, 그 가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부부 아닌가. 모든 부부들이 비둘기처럼 다정하게 손잡고 간다면 이 사회는 건강해 질것이다.
이 한편의 영화가 이 사회를 정화시키는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