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둥글넓적하게 생긴 것이 보름달처럼 넉넉하다. 노릇한 게 반지르르 윤기까지 흐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 그 이름은 단팥빵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이다. 샘솟듯 솟아오르는 입당김을 주체할 수 없어 한 입 옹골차게 베어 문다. 달짝지근한 맛과 향기가 입안을 휘돌아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간다. 뒤따라 들어오는 팥 속의 감미로운 맛도 미각을 부추겨 맛의 향연장으로 끌어들인다.
내 몸 속에 들어있던 이성은 잠자고 있는지 맛의 유혹에 정복당한 혀끝의 외침을 듣지 못한다.
'하나 더, 하나만 더, 오늘만 먹고 내일은 안 먹을 테니까.' 이렇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혀와의 전쟁에서 굴복 당하고 만다.
뒤늦게 잠이 깬 이성이 꾸짖는다. '팥빵, 꿀빵, 카스텔라, 찰떡, 시루떡 등 단것은 모두가 너에게 독이 된다고 그렇게도 말렸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먹었니?' 굴복 당한 후에야 때늦은 후회를 해 본다.
나는 왜 이렇게 단것이 당기는지 모르겠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단 것이 집안 어느 곳에 숨어 있으면 온통 촉각이 그곳으로 향한다. 그 촉각은 냉장고의 깊숙한 곳까지 넘나들기도 하고, 캄캄한 창고 속에도 들어간다.
며칠 전 눈 딱 감고 냉장고 속에 넣어두었던 찰떡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먹고 싶은 욕망을 눌러보겠다고 냉동실에 넣어둔 것인데 '귀찮아서 안 먹게 되겠지.'하던 그때의 생각은 빛을 잃고 말았다.
발과 손은 짝꿍이 되어 자동장치라도 단 듯 그것을 찾아내어, 전자레인지의 해동 버턴을 누르고 말았다.
그 순간은 감미로운 단맛 외에는 아무생각이 안 났다. 또 어떨 때는 창고 깊숙한 곳에 넣어둔 과자 생각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다.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 행사하는 과자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이것저것 집히는 대로 사둔다. 명분은 '손자들이 오면 주겠다.'였는데 그게 또 눈앞에서 맴을 돈다.
'딱 하나만 먹자.'고 체면을 걸어본다. 그러나 막상 창고 문을 열고 과자를 집어 드는 순간 악마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인다. '종류별로 한 개 씩만 맛보면 안 될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재빠르게 손이 움직인다. 고삐 풀린 말이 되어 종류마다 한 봉지씩 담아서 마법에 걸린 듯 단맛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언제부턴가 체중계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마치 염라대왕 앞에 서듯 저울대 위에 오르면 욕망이 저지른 죄과가 혀를 날름댄다.
과체중의 고지는 이미 20년 전에 넘었고, 비만의 문을 열고 들어선 지도 한참이나 됐다. 이제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고도 비만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치에 처했다.
식욕 억제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식욕이란 것이 온 몸에 침투하여 찰거머리처럼 눌러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안 먹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입의 빗장을 걸어 잠가 본다. 그러나 해외여행 때는 그 빗장이 무방비 상태로 풀린다. 음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각종 빵을 들고 강한 식탐을 뽐내본다. 이때만은 나의 식성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참담한 패배의 잔을 마셔야하니 어쩌랴!
친구들은 체중이 내렸다는데 나는 엄청난 체중 증가를 맛봐야 한다.
나는 단 것이면 모두가 맛있다. 빵, 떡, 과자, 과일 그리고 밀가루 음식에 중국 음식까지 모두가 살찌는 것만 좋아한다. 이들은 모두 나의 체중 증가에 공을 세운 일등 공신들이다.
나는 밥을 보약으로 알았던 세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나 같은 식성을 갖는다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다.
우리 형제들 중에서도 단 것 좋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유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이 병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간식이나 단 것은 생각 못했고, 보리밥이나 시래기 국도 못 먹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입이 까다로워 거친 음식을 거부했다. 나물이나 보리밥은 아예 먹지 않았다. 여름철이면 보리밥이 주를 이루는데 나한테까지 쌀밥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그래서 밥 때가 되면 주위를 맴돌며 간식거리만 찾아다녔다.
부지런하신 어머니는 밥을 굶고 있는 딸을 위해 찐빵, 감자떡 등의 간식을 만들어주셨다. 그 빵 속에는 비록 인공감미료지만 달콤한 맛이 숨어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단맛 입 당김이 시작됐다고나 할까….
밥을 먹는 날은 장날인데 그때는 생선찌개가 먹음직스러웠다. 지금도 생선찌개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 중의 하나다.
내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밥보다는 빵을, 그리고 가을에는 지천으로 널린 곶감이나 감 홍시, 떡 등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어릴 때의 경력은 노년에 접어든 나에게 부담이 됐다. 단맛으로 길들여진 내 몸은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입 당김의 유혹이 독버섯처럼 스며든다. 이때는 멘탈이 붕괴되고 오직 미각만이 나를 지배한다.
눈 코 귀 입을 다 막아도 참을 수 없다. 더 이상 두었다간 내 몸을 넘어뜨릴 것 같다. 독한 마음으로 입 당김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어느 날 입 당김의 유혹을 떨치려 산책로를 누비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 짚동만한 청년이 뒤뚝이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제 딴에는 살을 빼 보겠다고 나왔나 보다. 짐작으로도 100Kg은 훌쩍 넘긴 것 같다.
연민의 정이 슬며시 밀려온다. 저 아이도 나처럼 어머니의 잘못된 육아로 인해 살찌는 음식만 좋아하는 식성을 가진 게 아닐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옛날 사람이라 단것만으로 끝났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인스턴트식품에 노출돼 있다. 치킨, 피자, 라면 등은 저들의 몸을 망치는 주범들이 아닌가!
어머니의 배려로 내게 내려온 단 것 좋아하는 식성이 막내딸에게 대물림됐다. 잔병치레로 몸이 약하고 밥을 먹지 않는다고 나 또한 단 음식을 처방하고 말았다. 약을 먹이기 위해 사탕을 처방했고, 밥을 먹지 않는다고 떡볶이에 라면이라는 극약 처방을 했다.
막내는 지금 다이어트 하느라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제야 때늦은 명약 처방을 하며 막내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다. 시래기국과 미역국, 야채 등을 아이에게 먹이면서 죄인이 된다.
이래서 엄마의 역할이 아이의 인생을 좌우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깨닫고 후회해 본다.
먹지 않는다고 달콤한 임시방편의 처방을 해서는 안 되고, 안쓰럽다고 애 대신 모든 일을 해결해 줘서는 더욱 안 된다.
지금 젊은 엄마들은 나보다 더 애들을 과잉보호하고 있으니 장래가 걱정이다. 장래에 우리 아이들이 비만아, 마마보이, 마마 걸이 되는 건 뻔 한일 아닌가.
미련하게 밥만 먹이는 사람을 아래로 봤던 내 잘못이 수면 위에서 자맥질한다. 서양 속담에도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했다. 맛있는 것 떠 먹여 주고 대신 해주고 과잉보호로 자생력을 떨어뜨리는 등의 잘못이 미래의 자식에게 미칠 영향을 예견했어야했다.
구정 때 큰 딸이 두 손자를 데리고 오면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해야겠다.
손자에게까지 나쁜 식성, 나쁜 습관을 대물림해서야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