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지게
지게는 이제 까마득한 옛 이름이 되어버렸다. 가끔 동화 속 나무꾼과 선녀네 집에서나 볼 수 있다. 누군가가 기어코 지금 그것을 만나겠다면 농업 박물관을 찾아야만 한다.
얼마 전 시집간 딸네 식구가 왔기에 옛 물건들이 전시된 '고가촌'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건 손자뿐만 아니었다. 30대의 딸 부부 역시 처음 보는 물건들이라 잔뜩 호기심을 보였다.
거기에는 맷돌, 키, 호롱, 등잔, 멍석, 베틀 그리고 지게까지 내 어릴 적 보아왔던 낯익은 물건들이 반갑게 품에 안겼다. 농업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농기구들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식당에서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식당 주인의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난 유독 지게에 애정이 갔다. 어렵던 시절 가장의 등에 업혀 가정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눴다. 그러기에 지게를 보면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었던 이 땅의 아버지들이 보였다. 또 나에겐 이 지게가 특별히 기억해야할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지게만 보면 나의 무거운 짐을 담당했던 분들이 떠오른다. 20년 전 대구로 이사 올 때 받았던 그 사랑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그 옛날의 지게는 농작물이나 나뭇짐을 나르는데 쓰였으며, 어린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자가용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 지게는 우리 조상들의 애환이 담겨있어 고생과 가난 멍에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지게를 늘 가까이 두고 자식처럼, 친구처럼, 생각하며 아끼고 사랑해 왔다. 지금은 세월과 함께 현대 문명의 쓰나미에 밀려 이 지게는 자취를 감춰버린 대표적인 물건이 되었다. 리어카가 나오고 경운기가 나와 웬만한 시골에서는 지게를 구경하기가 힘들게 됐다. 그러니 80년대 이후 시대를 살아온 우리 아이들이 지게를 알 리가 없다. 그런 잊혀져간 지게가 나에게 사랑을 날라 주었으니 나에겐 '사랑의 지게'가 됐다.
90년대 초 남편의 근무지 때문에 시골에 살았을 때 이야기인데, 이웃들과 사촌처럼 알뜰히 정을 나누고 살았다. 그 때문에 근무 점수를 얻게 되어 대구 근교로 발령이 났다. 기다렸던 일이라 기쁜 일은 분명한데 정든 시골 동네를 떠나야하는 아쉬움이 발목을 잡았다.
이 곳 시골 교회 성도들과 이웃들은 진한 눈물을 흘리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그들 중에는 우리가 이사할 곳이 5층 아파트임을 알고, 이삿짐 나르기 대책을 세우며 우리 가족을 헌신적으로 도우려했다.
차를 가진 사람은 차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삿짐 싸기, 당일 먹을 음식 만들기, 등으로 자신들의 할 일을 분담했다.
당시 교인 중에는 개인택시를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영업을 하루 쉬고 우리 가족을 실어 날랐다. 또 트럭을 가진 집사님들은 깨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분류하여 몇 대의 트럭에 나누어 실었다. 그때 교인들이 가진 트럭이 모두 동원되었다.
짐을 다 싣고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에 목사님을 비롯한 교인들과 나와 교분을 가졌던 이웃들이 잔칫집에 손님 모이 듯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의 이별 기도가 끝났다. 그들 중에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음을 억지로 참기도 했고, 간혹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잠깐만! 잠깐만!"을 외치며 전송 나온 인파들 속을 헤집고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군중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꽂힌 곳은 그의 두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지게였다.
박장대소 하는 사람, 배를 움켜쥐고 죽어라 웃어대는 사람 등, 슬픈 분위기는 간데없고 웃음바다가 됐다. '요즘 세상에 이사 가는 데 지게라니! 말도 안 된다.' 여기저기서 쑥덕쑥덕 대는 소리가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내 입장에선 조상의 유산으로 간직했던 귀한 물건을 나를 위해 가져왔다고 생각하니 성의를 봐서라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구닥다리 같은 지게를 이삿짐 꼭대기에 매달고 대구로 향했다.
이삿짐이 도착한 대구에서는 이삿짐 위에 매달린 지게를 보고 이상한 듯 신기한 듯 창밖을 내다봤다.
이들은 '이보다 더 신기한 구경거리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래층 위층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이 희귀한 이삿짐을 보고 외계인을 본 듯 신기한 눈으로 밖을 내다봤다. 잠시 후 이들도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이사 오는가? 그럼 저 피아노는 뭐야!' 등의 수근 거리는 소리를….
이런 웃음거리의 지게가 큰 몫을 하게 됐다. 차에서 내려진 많은 짐들이 지게에 실려 5층으로 옮겨질 때는 사람이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양의 3배는 거뜬히 해냈다. 지게에 우리의 살림살이를 지고 묵묵히 오르는 그들의 얼굴에서 넘치는 인정과 신뢰감이 느껴졌다.
하찮은 물건이라 웃었던 지게였지만, 우리의 짐을 거뜬히 날랐고 사랑까지 날라주었다. 나는 이 지게를 '사랑의 지게 '라 부르고 싶다. 그 이후 '사랑의 지게' 이야기는 동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요즈음엔 엘리베이터 없는 저층아파트도 사다리차가 있어 쉽게 이삿짐을 나를 수 있고, 포장이사까지 있으니 이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해서 16번 정도 이사하는 동안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처음 신혼살림은 리어카로 옮겼다. 다음엔 2톤 트럭으로, 그 다음엔 5톤 트럭으로 이렇게 살림살이가 불어나면서 이사하기는 점점 더 번거로워졌다. 어린 애들 데리고 남들보다 많은 책이랑 피아노 등을 옮기려면 앞이 캄캄했다. 몇 달 전부터 짐을 싸야 하고 이사 당일 날의 일기며 일꾼 관리 등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지금도 사다리차를 대 놓고 이삿짐 나르는 것을 보면 시골 살 때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면서 살았던 그 인정이 그리워진다.
처음엔 면 소재지의 열악한 학교에 발령이 나서 어린 애들 데리고 이사하랴 전학하랴 무지 애를 먹었다. 그 곳은 인심이 좋지 않기로 소문 난 곳이었고, 자신보다 좀 나은 도시형의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전학한 아이들도 시골 아이들의 질투로 왕따를 당했다.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내는 그 곳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하루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그들의 빗장이 열렸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적극적이었고 인정이 넘쳤다.
이삿날을 받아 놓고는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워했다. 그 중 몇 분의 아저씨들은 대구까지 와서 이삿짐을 정리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5층 아파트에 쉽게 짐을 옮기는 방법으로 지게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생각나는 사랑의 지게 이야기다. 당시 50대였던 아저씨가 쌀 한가마를 지게에 지고 5층 아파트를 올라갔으니 30대인 우리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게에 실린 이삿짐은 사랑이었고, 나뭇짐 위에 꽂힌 진달래 꽃다발이었다.
그때 그분들은 이제 80대의 노인이 됐겠지….
'사랑의 지게'이야기는 두고두고 내 인생에서 고마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