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고향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무게 중심으로 남아있다.
차곡차곡 쟁여 두었던 그리움이 솔바람만 불어도 포르르 일어난다. 그 속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어 무성한 푸름을 자랑하는 정자나무가 있다. 또 시냇물엔 잠방이 걸친 사내아이들이 물고기 잡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통치마 저고리 입은 단발머리 소녀도 조약돌 모아 소꿉놀이 한창이다.
오늘은 바람도 없는 고요한 날인데도 그리움의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 바람결 타고 오는 부모님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이고, 그 목소리는 나를 부른다. 난 이미 그 옛날 어린 시절 속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내 어릴 때 살던 집에는 집채만큼 큰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안마당 한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두루뭉술한 등짝 한가운데는 백두산의 천지 같이 홈이 패어 있었다. 비가 오면 이곳은 작은 호수가 됐다. 머리 부분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린 모습이 꼭 안방을 향해 먹을 것을 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바위가 칠성바위 중의 하나(이 동네의 7개의 영험 있는 바위)라시며 무척 아끼셨다.
바위 주위를 늘 깨끗이 청소하시고 꼬리와 다리 부분엔 장미, 원추리, 국화, 작약, 등의 꽃들을 심으셨다. 입이라 여겨지는 부분은 두꺼비가 목마르지 않아야 된다며 시멘트로 물탱크를 만들어 놓았다. 바위의 등 부분은 포도넝쿨을 올려 마치 두꺼비가 이불을 덮은 양, 포도송이를 한 짐 가득 지고 있는 양 보였다.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의 불꽃이 전국으로 퍼져 갈 때 우리 마을은 전국 새마을 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대부분의 낡은 집은 개축 또는 신축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집은 그 바위를 깨고 넓은 터 위에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기존의 옹색한 자리에 좁은 집을 짓고 바위는 그대로 살려 두었다.
서울에 사는 오빠는 이 집을 팔고 좀 더 교통이 편리한 면 소재지로 옮기자고 해도 '이 복 바위를 두고 어디 가냐?'며 들은 채도 않으셨다.
어릴 때 나는 이 바위에 올라가는 것이 목표였다. 있는 힘을 다해 바위에 올라앉으면 넓은 등짝이라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고개만 들면 포도송이가 있고, 포도 잎이 햇빛을 가려주어 소꿉놀이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꽃밭에 있는 꽃잎과 덜 익은 포도를 따서 바위 등의 웅덩이 속에 쌓아놓았다. 또 감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포도 잎으로는 모자를 만들어 썼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바위가 무슨 큰 재산이나 되는 것처럼 으스대곤 했었다.
당시는 포도가 귀하던 시절이라 포도 한 송이 얻어먹고 싶은 동네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면 나는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 포도 한 송이씩을 나눠주곤 했다. 맛이라야 지금의 포도 맛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당도도 떨어지고, 모양도 탐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보물이나 되는 듯이 동네 아이들의 애를 태우게 했다. 장독 옆에 재래종 장미꽃도 있어, 이 꽃잎으로도 으스대며 마음에 드는 아이만 나눠 주었다. 장미꽃도 먹거리가 됐던 그 시절이기에 포도와 장미와 감까지 가진 나는 부자 중 부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다.
세월은 흘러 4남매는 모두 객지로 떠나고 부모님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 집을 팔게 되었다.
아버님을 먼저 여의고 어머님이 혼자 빈 집을 지키고 계실 때는 가끔 고향 집에 들러 고향의 흙냄새를 맡으며 지난 이야기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차츰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자 작은 아들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 돌아가시게 됐다. 그러니 사실상 고향과는 이별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고향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무지개빛깔 희망이 되어 외로울 때나 고달플 땐 생각만 해도 싱그럽고 풋풋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봄 날 아파트의 밀림 사이로 봄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날따라 화단의 목련 꽃은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봄바람도 살랑이며 춘심을 돋우었다.
봄바람 따라 내 마음은 어느새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물고기 잡던 냇가와 진달래 따 먹고 쑥 캐던 산과 들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 그리움의 열병은 목구멍에 불잉걸이 일어나듯 화끈 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안 계신 고향인데 무슨 명분으로 갈 거냐는 마음의 저항도 있었다. 그러나 두껍바위 위에서 놀았던 그 풍성한 유년의 그리움을 지울 수 없어 용기를 내어 고향에 가기로 했다.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고향인데 왜 그리도 찾기가 어려웠던지….
쳇바퀴처럼 맴을 돌던 일상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그립던 고향 냄새 코끝으로 스며들고 마을 앞 정자나무 두 팔 벌려 반긴다. 고샅으로 접어드니 낯 선 사람들이 쳐다본다. 젊은 청년은 누구며 젊은 아지매는 또 누군가? 아마 내가 떠난 후 시집 온 사람들일 테지. 그리고 저 젊은이들도 나 떠난 이후에 태어났으니 낯 선 것은 당연하지. 허리 굽고 등 굽은 할머니는 내 이름을 대니 알아보고 반긴다.
옛 시인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었는데 고향의 산천은 이 시구와 사뭇 달랐다. 낮은 산은 잘려 나가 고속도로가 되었고, 맑은 물이 흐르던 개울은 시궁창으로 변했다. 동구 밖 정자나무는 그런대로 모습이 남아있어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만난 사람들은 낯설었다. 등 굽고 백발을 머리에 이고 가는 저 노인은 누군가? 이들은 내 어린 시절 한창 청년기에 접어들었던 아지매 아재들이다.
'우리 집은 그래도 그대로 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이 뛰어 나올 것 같았다. 외양간엔 소가, 돼지우리엔 돼지들이 나를 반길 것 같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낯 익은 마당 앞에 섰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옛 집은 휑하니 넓은 공터였다. 돼지들이 꿀꿀대며 소란을 피워대던 돼지우리도 없어지고, 새벽을 알려주던 닭장의 닭들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보고 싶었던 두껍 바위가 없어진 것이다. 내 유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이때 어머니가 계셨으면 얼싸안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황량하게 넓은 마당과 덩그러니 몸채만 남은 우리 집. 그 모습은 내가 바란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감나무, 가죽나무, 그립던 포도나무, 찔레꽃 등의 모든 추억도 사라졌다. 그 때의 그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낯선 사람이 나와서 '무엇 하러 왔느냐?'고 물을 까봐 부리나케 되돌아 나왔는데 마음속엔 납덩이가 든 것같이 무겁기만 하다.
이제 고향에선 고향을 찾을 수 없다.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이나 수몰 지역 사람만이 실향민이 아니다. 나도 이제 실향민이 된 것을….
이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향 친구 만나 굳게 약속했다. 애들 다 출가 시키고 몇 명이 모여 고향 동네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노년을 보내자고….
*2000년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