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흰머리 소년

류귀숙 2015. 1. 16. 18:45

           흰머리 소년

 꽤 오랜만에 외사촌 동생을 만났다. 버선발로 맞아준 그 정다움이 끈끈한 줄로 나를 당겼다.

 시간의 더께가 시루떡처럼 쌓여있는 공간에서 동생과 마주 앉았다. 참 많은 세월 동안 시간과 함께 생의 여정을 가면서 고생도, 사연도 많았으리라.

 활짝 웃는 그 모습은 옛 모습과 흡사한데 그 많은 시간들이 온통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듯하다.

 "어느새 백발이 다 됐군! 검은 머리 한 올 없이 온통 백색이구먼!"

 백의의 천사가 간호사 캡을 쓴 듯 흰색 지붕을 덮어쓴 동생의 얼굴이 마침 지나가는 석양빛을 받아 빛을 발한다. 아마 세월이 그의 머리위로 가속페달을 밟으며 휙 지나갔나 보다.

 

 나는 오늘 작정을 하고 몇 년 벼르던 그와 만나는 일을 해 보려 한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는 그가 금융계에서 성공했다는 꽃 소식이었다. 어려운 터널을 뚫고 거목이 됐다니 만나서 어깨라도 토닥여 주고 싶다.

 가끔은 전화기를 타고 온 다정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목소리를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오늘은 그게 미안해서 그를 찾았는데 지하철역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반갑고 또 미안하다.

 중학교 시절엔 누나니 동생이니 하는 서열을 내려놓고 위 아래 없이 섞여 놀았다. 이웃면에 살면서 중학교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 한 해 후배가 되어 들어왔다.

 눈, 비가 내리는 날엔 고모집인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그때 그 모습이 눈앞을 스쳐간다. 까만 교복을 입은 개구쟁이 소년. 그 소년이 이제 백발로 변했으니 생경스럽다.

 '왜 염색을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 난 흰머리 소년 이예요. 멋있잖아요." 라고 했다. 그래 맞아! 넌 아직 소년이야!

  아직도 그 옛날의 홍안을 간직하고 있고,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도 아직 그대로다.  웃는 모습. 다정한 목소리까지 잃지 않았으니 틀림없는 소년이다.

 그 흰머리를 다시 보니 꽤 멋있다. 은빛을 발산하는 게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건 세속으로 덧칠된 염색 머리보다 훨씬 돋보이는 순수하고 깨끗한 은빛 면류관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타임머신을 타고 중학생 시절의 장면 속으로 들어갔다. 

 핏줄의 당김인가! 아님 동시대를 걸어온 과거를 공유했기 때문인가!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합일을 이루었다. 난 한살 위의 누나가 되고 동생은 개구쟁이 소년이 되어 그 시절로 돌아가 본다.

 중학생 교복을 입고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복조리 장사를 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화의 열기가 서서히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정월 대보름 무렵 그는 가정 경제를 생각하며 복조리 장사 길에 나섰다.  어린 나이에 이 동네 저 동네를 돌며 조리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때 100쌍이나 되는 조리를 거의 다 팔고 3쌍은 남겨 두었다고 한다. 한 쌍은 본가에, 한 쌍은 큰집에 또 한 쌍은 당숙 몫으로 남겼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어쩜 이런 대견한 생각을 했을까! 생각의 깊이가 10대 소년이라고 말하기에는 거짓말 같다. 이렇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을 보여줬다. 그의 얼굴위로 당찬 중학생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어깨로 가족을 책임져야할 사명을 느꼈다고 한다. 무거운 짐 버겁게 지고 대구로 나와서 큰 도매상의 점원 노릇을 시작으로 십대의 사회인이 됐다. 마침 올곧은 사장을 만나게 되어 바른 길로 갈 수 있었는데, 그건 복중의 복이었다.

 "그 사장님의 인생철학인 정직과 성실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게 아닐까?" 라고 말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넓은 가게 청소를 했고, 손님들에게는 정직과 성실로 대했다.

 그 당시는 물건 포장을 할 때 가마니에 넣고 새끼줄로 묶었는데, 짐을 풀 때도 사장은 그 새끼줄을 잘 풀어서 재사용 하라고 했다.

 한 번은 새끼줄 풀기가 귀찮아서 가위로 묶은 줄을 싹둑 잘라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게 탄로가 나서 사장님께 호되게 야단맞고 밤새워 끊어진 새끼줄을 다시 이었다고 한다.

 그때 그 일 이후엔 정직하게 바른 길로만 가야함을 깨달았단다. 그 사장님은 몸소 정직과 성실을 가르치신 분이다. 지금도 기성세대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는 전수받은 정직과 성실의 인생철학으로 식당을 경영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금융계에 들어와서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딛고 있는 튼튼한 발판으로 부실 경영을 튼실한 경영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는 동생이 큰 바위 얼굴처럼 크게 보였다.

 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니 왠지 작아 보인다. 동생에 비하면 나는 인생철학도 희미했고, 수확할 열매는 찾을 수가 없다. 부끄러운 모습 감추고 싶다.

 나의 가르침으로 바로 서야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들에게도 미안하다. 아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했다고 자책해 본다. 그러나 성공한 사촌 동생이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남은 생이라도 동생을 롤 모델로 살아볼까?

 시간 나면 우리 아이들 데리고 가서 그의 성공담을 들려주고 싶다. 나에게 배울 게 없으면 5촌 아저씨께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차세대를 바라보는 우리 기성세대들은 불안하다. 고생을 모르고 자랐으니 어찌 어려움을 이길까 걱정이다.

 내 어쭙잖은 글 솜씨로 동생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동생의 사례가 널리 퍼져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청소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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