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류귀숙 2015. 6. 1. 19:28

   껌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쩍쩍 달라붙는다. 초강력 접착제처럼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새로 산 하얀 샌들을 신고 외출할 때는 기분이 꽤 좋았다.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햇살은 이미 기온을 30도 이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그늘진 곳은 낮은 습도 때문에 싱그러움과 풋풋함이 넘쳤다. 발걸음도 가볍게 또박또박 리듬에 맞춰 걸었는데, 이게 웬 말인가! 구두 바닥에 철썩 달라붙은 껌이 찐득거리며 신발을 바닥에 주저앉히려 한다. 사정없이 비비고 밟아 뭉갰더니, 거무스름한 흙까지 달라붙어 새하얀 구두에 거뭇한 흠집을 남겼다. 울컥 화가 치민다. 집에 돌아와 칼로 도려내 봤다. 그래도 신통찮아 수세미에 세재를 듬뿍 묻혀 씻어도 봤다. 아무래도 진드기처럼 눌러붙어 구두와 생사를 같이 할 모양이다. 전쟁이 이미 시작됐으니 마냥 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인터넷 검색으로 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일단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내 이메일 방으로 먼저 들어가 본다.

 이건 또 뭐야! 얼마동안 비웠던 방에 껌 딱지 같은 족속들이 내 이메일 방에 척 들어앉아 와글거리고 있다. 그사이 100개도 넘는 스팸들이 껌처럼 들어붙어 시위라도 하는 듯하다. 음식에 달라 붙은 파리 잡듯 모질게 때려잡았다.  '이 메일은 삭제 후 북구가 불가능 합니다. 정말 완전 삭제하시겠습니까?' 라는 멘트에 마우스를 확인에 갖다놓고 모질게 밟아버렸다. 신경질적으로 껌을 딱딱 씹으며 내 방에 들어앉은 스팸들을 질겅질겅 씹어버렸다.

 껌과의 전쟁이 이미 시작됐으니 이길 수 있는 무기를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땅콩기름을 바르면 된다고 알고 있지만 구할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는 물파스, 에프킬라, 아세톤 등의 무기가 소개되어 있다. 쉬운 것부터 차례로 사용했더니, 기세가 차츰 누그려 들더니 급기야 꼬리를 감추었다. 

 껌 딱지가 사라지니 나의 치솟던 화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도리어 껌에 대해 미안함마저 들었다.

 이렇게 껌이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니었는데…. 나와 친하게 지냈던 세월이 얼만가? 오늘 도전장을 낸 껌은 배신한 인간에 대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옛날에 껌이 귀했을 때는 씹던 껌을 절대로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사용한 껌도 벽에 붙여 놓고 몇 번을 더 사용했다. 입 속에 껌이 있는 아이는 으스대며 딱딱 소리를 냈다. 한 번 내 입을 찾은 껌은 친구이자 장난감이었다.

 처음 씹었을 때의 그 달콤한 맛이며 입 안 가득 퍼지는 향기는 어느 음식보다도 더 오래 남았다. 또 껌은 입 냄새를 막아주고 치아 청소도 도와 줬다.

 껌이 귀하던 그 시절에는 생밀을 씹어 껌처럼 만들어 씹기도 했다. 껌만큼은 못해도 씹히는 맛이 껌을 많이 닮았다. 또 껌에다 여러 가지 색소를 넣어 고운 색깔의 껌을 만들어 씹기도 했다. 껌을 혀끝으로 내밀어 풍선처럼 불었다. 손으로 뭉쳐서 넓적하게 펴고는 입으로 구멍을 내며 빡빡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럴 때는 껌은 좋은 장난감이 됐고 친구가 됐다. 그런 친구 같은 껌이 오늘 내 구두에 붙어 나와 한 판 승부를 겨루고 있다. 오늘은 여러 가지 무기로 대처한 나에게 슬며시 꼬리를 내렸지만 나는 껌의 분노를 안다. 그리고 그 외로움도….

 인간의 무관심과, 몰염치, 이기심으로 인해 친구 같은 껌을 원수로 삼고 있다. 또 그뿐인가, 조물주께서 주신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의 욕심으로 함부로 대한 결과 이 땅에 자연 재해가 찾아오고 각종 질병들이 창궐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던 병들이 이상한 이름을 달고 인간에게 분노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신종 플루'라는 바이러스가 나타나 인간의 생명을 앗아갔다. 또 얼마 전에는 '에블라'가 나타나 공포로 몰아갔다. 이번엔 '메르스'라는 아주 강한 바이러스가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다. 이렇게 당하고도 인간들의 만행은 그칠 줄을 모른다. 이 모든 질병들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닌 줄 안다.

 친한 친구 중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암세포와 일전을 벌이는 친구가 있다. 인간에게 분노한 그것들은 일단 몸속에 들어오면 끝까지 달라붙는다. 머리칼을 뭉텅이로 잡아채더니 손발의 감각까지 가져갔다. 그 다음으로 기운과 식욕마저 앗아갔다. 그래도 친구는 그들을 원망하지만 않고 아픔의 모퉁이에서 당당히 맞서고 있다. 어떨 때는 그들을 친구처럼 달래며 함께하고 있다. 때로는 단호하게 혼을 내 주며 결연한 의지도 보이고 있다. 가발 눌러쓰고 씁쓰레한 걸음을 걸을지언정 털썩 주저앉지 않고 오똑이처럼 일어나는 친구에게 박수를 보낸다.

 잠시 머물며 두리번거리다 보면 그 병마도 어느 한 모퉁이에서 쉬어가지 않겠나. 친구야! 서둘지 말자꾸나. 차근차근 침착하게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희망이 있지 않겠나. 그들이 앙칼지게 나올지라도, 어깃장 놓으며 앙탈을 부릴지라도 우리 희망의 끈은 다부지게 붙들자. 따지거나 원망하지 않고 쉬엄쉬엄 가노라면 그도 지쳐서 쉬어가지 않겠나.

 입안이 텁텁해서 껌 하나를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달콤한 향이 입안을 맴돈다. 딱딱 껌 씹는소리도 경쾌하다. 함께했던 껌 친구를 종이에 고이 싸서 이별을 한다. 다시는 분노의 몸짓으로 신발이나 옷에 달라붙지 않기를 바란다.

 스팸도 끈질긴 암세포도 일단 나와 만나 친구로 삼았으니 그들과의 이별도 격식을 차려야하지 않겠나.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가는 길에 불이라도 밝혀 고이 보내야 할 것 같다.

 친구야! 그래도 돌아보면 웃었던 일들이 더 많지 않았던가? 그러니 '친구야! 행복도 불행도 쉬엄쉬엄 가노라면 모두가 인생의 멘토가 될 것 같다.' 껌이나 병도 어르고 달래며 친구로 대한다면 그도 꼬리를 내리고 안겨오지 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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